한산대첨 1,2차 출전해전의 각 특징은 각 포구에 정박하고 있는 왜적의 항해중인 적과의 조우전에서 승리하였으나, 제3차출전 한산대첩은 왜적이 남해를 돌아 여수 전라 좌수영을 격침하고, 서해진출을 꾀하려는 일본의 최정예수군부대 왁키자카 야스하루 수군장수가 지위하는 일본수군과의 전략 전술을 겨루는 최초의 조일정규 해전이었다.
이 한번의 해전으로 일본수군은 재해권을 상실하고 서해진출을 포기했고, 평양까지 진출하여 평양성을 탈완한 곤니시 유끼나가 부대보급료를 확보하지 못해 후퇴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나 부산에서 평양까지 육로를 수송하려면 말500마리가 필요하고, 호위하는 군사가 따라야 하는 식량까지 감안하면 육로로의 보급은 불가능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일본군은 남해를 돌아 서해진출을 꾀하려다 한산해전을 패배로 재해권을 잃은 왜적은 서해진출을 포기하지 않을수 없었다.
만약 한산해전의 승리가 없고, 일본군이 서해진출이 가능해졌다면 서해를 돌아 한강으로 서울과 대동강을 따라 평양에 전생수행에 필요한 각종 보급품이 원활이 보급되었을것이고, 일본군은 조선침략을 성공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한산해전의 승리가 나라를 구한 대첩임을 알 수 있다.
위 내용은 유성룡의 징비록이다.
왜적의 장수 "고니시 유끼나라"는 평양까지 뒤따라와서 우리조정에 글을 보내 일본본의 수군 10만여명이 서쪽바다로 오는 중이니, 대왕선조의 행차가 어디로 갈것입니까 라고 위협했다.
위의 내역 외에 더 많은 자료로서 세계4대해전사의 하나인 한산해전의 이순신장군이 계발한 학인진법에 의해 세계에다 다시한번 알려줄 수 있는 영화를 만들 계획이다.
세계제4대해전의 으뜸인 한산대첩이 없었다면
일본군의 서해진출과 조선침략의 성공으로 조선의 일본 합방이 300년 빨라졌을 것이라는 역사가들이 한결같은 의견임
이 해전에서 패한 적장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와키자카기에 패전을 소상히 기록해놓았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성급했고 그는 침착했다. 나의 전술은 단순했고 그의 전술은 치밀했다. 무엇보다 나는 그의 거대한 학익진 진법앞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것은 나의 완패였다. 나 와키자카의 함대는 적장 이순신에게 완패를 당한 것이다. 한산도 전투는 완벽한 대패였다. 그것은 나 와키자카 야스하루에게 죽음보다 더한 치욕이었다."
협판기 제20집 하(下)
와키카자 야스하루의 차남인 야스모토가 편찬한 와키자카 가문에 대한 기록 1642년 편찬기록에 의함.
그로부터 300여년이 지난 후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후예 일본해군은 한산해전을 높이 평가하여 적장이였던 이순신을 숭상해 해마다 통영한산도 제승(制勝)당을 찾아 진혼제를 올렸다.